은행나무 여행지
가을날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대표적인 은행나무 여행지들을 소개한다.
은행나무가 멸종위기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각별하게 느낄 것이다.
글 문유선 여행작가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양평군청
글 문유선 여행작가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양평군청

아산시 인근 곡교천변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이 왔다. 떨어지는 잎사귀는 가을의 상징이다. 단풍 하면 불타오르는 홍엽(紅葉)이 먼저 떠오르지만 황금처럼 빛나는 황엽(黃葉)도 반갑다.
엽락지추(葉落知秋), 일엽지추(一葉知秋) 등은 모두 가을을 뜻하는 사자성어다. 나뭇잎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맛으로는 은행나무가 으뜸이다.
은행은 동아시아 원산지의 나무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기 전에 잎사귀가 샛노랗게 물들어 아름답고, 병해충에 강한 특징 등 다른 여러 장점이 있어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2억~3억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 왔다는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진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살아있는 화석(living fossil)’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IUCN 적색 목록에서 멸종위기종(EN, Endangered)에 속해 있다. 한국에서는 가로수 등으로 흔히 볼 수 있지만 야생에서 사람의 도움 없이 번식하고 자생하고 있는 은행나무 군락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 지정의 이유다.
나무 높이는 보통 15~40m 정도이지만 고목은 60m 넘게도 자란다. 생명력이 강해서 가지와 뿌리를 제거하고 줄기만 남은 상태의 은행나무조차도 몇 년간 잎이 돋는 일도 있다. 그래서인지 역사가 긴 사찰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 중에는 무슨무슨 고승이 꽂아두고 간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 자라났다든가 하는 식의 전설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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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 용문산 은행나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나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있다. 천연기념물 30호인 수령 1,500년 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높이 42m, 뿌리둘레 15.2m에 달하는 거목이다. 황금빛 노란 단풍이 물든 용문사 은행나무는 10월 중순을 지나면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천년 고목에는 아직도 은행이 열리고 영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자라난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 세종(1418-1450) 때에는 정3품보다 높은 벼슬인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기도 한 이름난 나무다.
용문산관광지에서 용문사까지 조성된 1.2km의 계곡 산책로 구간은 대표적인 힐링 명소다. 용문산 꼭대기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계곡 물소리와 단풍, 소나무가 한데 어울린 오색찬란한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
양평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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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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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향교 은행나무
서원이나 향교에는 유독 은행나무가 많은데,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중국 송나라 때 공자묘를 이전하면서 강당 터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손이 살구나무를 심었고, 금나라 때 행단이라 쓴 비를 세웠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해석도 있다. 살구나무 행(杏)은 은행나무라는 뜻도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를 은행나무로 해석해 서원과 향교에 은행나무를 즐겨 심었다.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는 MZ세대에게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주향교 대성전과 명륜당 앞뜰에 약 400년 된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씩 있다. 검은 기와지붕에 샛노란 잎이 쌓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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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동서원 은행나무
서원 중에는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 은행나무가 압권이다. 도동서원은 조선 선조 38년(1605) 지역 유림이 한훤당 김굉필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앞쪽에 강학 공간, 뒤쪽에 제사 공간을 두는 전형적인 서원의 건물 배치를 유지하고 있어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한훤당의 외증손인 정구(1543~1620)가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적게 잡아도 400살이 넘은 나무다. 서원 입구 누각 수월루 아래 땅에 닿을 듯 넓게 가지를 드리우고, 바로 앞 낙동강과 풍광과 어우러져 완벽한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
대구 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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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문광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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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충북 괴산군 문광면 문광저수지 둘레길은 가을이면 수백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이 길은 1977년 양곡리 마을의 김환인 씨가 은행나무 200그루를 기증해 조성됐다. 이후 마을주민들의 노력이 더해져 아름다운 은행나무길이 탄생했다.
거울처럼 맑은 문광저수지에 비친 은행나무의 풍경은 찾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매년 늦가을이면 저수지의 물안개가 은행나무길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가을이면 새벽부터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문광 은행나무길 주변을 가득 매운다.
이 길은 2013년 ‘비밀’, 2019년 ‘동백꽃 필 무렵’, 2020년 ‘더킹: 영원의 군주’ 등 드라마에 등장했다. 은행나무길 주변에는 밤에도 맘껏 감상할 수 있도록 조명이 설치돼 있으며, 조명은 11월 중순까지 불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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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는 1966년 지정된 천연기념물(제175호)이기도 하다.용계리 은행나무는 1994년 임하댐 건설 때 주목받은 나무다. 안동시는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해 있는 용계리 은행나무를 15m 정도 들어 올려 심었다. 수령 700년으로 추정되는 용계리 은행나무는 높이 37m, 둘레 14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큰 수목을 상식(이식)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들어간 예산만 약 27억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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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용계리
강원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반계리 은행나무는 196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고 수령이 8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나무 높이는 34m, 최대 둘레는 16m, 성인 10명이 두 팔을 벌려 안을 정도다. 가지는 동서로 37m, 남북으로 31m가량 넓게 퍼져있다. 나무 전문가나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로 손꼽힌다.
이 나무에는 마을을 지나던 노승이 목이 말라 물을 마신 뒤 짚고 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이 나무가 됐다는 설과 나무 안쪽에 백사가 살고 있어서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고 신성시했다는 전설이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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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반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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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반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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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금시당 백곡재 은행나무
금시당은 조선시대 문신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건물이다.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것으로 산수와 전원에서 여생을 즐긴다는 뜻이다. 명종 21년(1566)에 처음 지은 금시당은 임진왜란(1592)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43년에 백곡 이지운 선생이 복원한 것이다.
백곡재는 백곡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철종 11년(1860)에 세운 건물이다. 이곳에는 이광진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있어 금시당에서 내려다보는 밀양강 풍광과 어우러져 가을 정취를 더해준다. -
밀양 금시당 백곡재